주제로 본 한국사 우리역사넷

주제로 본 한국사 우리역사넷

주제로 본 한국사 우리역사넷

Blog Article


세종의 맏아들 문종이 2년이라는 짧은 치세 뒤에 서거하고 문종의 아들 단종이 뒤를 이었으나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오른 단종은 곧 병권을 장악한 세종의 차남이자 숙부 되는 수양대군에게 빼앗겼다. 세조는 아버지 세종이 채택한 의정부 서사제를 폐지하고, 조부 태종이 주창한 육조 직계제를 부활시켜 왕권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사육신을 비롯한 많은 신하가 숙청당하고 많은 학자를 양성하였던 집현전을 폐지하였다. 세조는 태종처럼 신하의 권력을 제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호패법을 다시 복원하고, 《동국통감》, 《국조보감》 등을 만들기도 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에서 승리하여 왕위에 오른 태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임금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관료 제도를 정비하였다.


원문은 물론 한글로 번역된 조선왕조실록을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만날 수 있는 시대. 조선왕조실록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감동을 주는 조선의 살아있는 역사이자 위대한 기록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봉안하거나 꺼낼 때도 일일이 기록으로 남겼는데요.


중간 부분은 도원을 가로막은 첩첩산중의 암벽이 묘사되었어요. 그리고 오른쪽에는 분지처럼 보이는 곳에 복숭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도원이 펼쳐져 있어요. 그가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듣고 그린 ‘몽유도원도’는 무릉도원이라는 이상 세계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가 한 화폭 안에서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있는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어요. 안견은 도화서(그림 그리는 일을 담당했던 관청)에 소속된 전문 화가였어요.


그래서 신윤복의 그림은 조선 후기의 살림살이, 의복, 머리 모양 등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요. ‘월하정인’은 늦은 밤 담 모퉁이에 남 몰래 만나는 한 쌍의 남녀를 긴장감 있게 표현한 그림이에요. 뒷모습밖에 보이지는 않지만, 살짝 왼쪽으로 돌린 고개를 보면 씨름에는 관심이 없어보이네요. 그 소년은 아무래도 엿장수가 팔고 있는 엿이 먹고 싶은가봐요. ‘고사관수도’는 세로 23.4㎝, 가로 15.7㎝ 크기의 종이에 그려졌는데, 어른 손바닥 크기를 조금 넘는 자그마한 그림이에요. 먹선으로 그은 나무 덩굴에서 아래로 내려온 잎사귀에는 살랑살랑 바람이 부는 모습이 묘사되었어요.


성균관 명륜당은 유생들이 수업을 받고 공부를 하는 건물로 오늘날 학교 교실과 같은 곳이에요. 명륜당 앞뜰에는 동쪽과 서쪽에 각각 동재와 서재가 있어 서로 마주 보고 있어요. 동재와 서재는 학생들이 먹고 자고 생활하는 기숙사와 같은 곳이었어요. 박제가는 “모든 길을 막아놓고 문을 하나(과거제)만 만들어놓으면 공자님이라도 해도 그 문을 거쳐야 할 것”이라고 한탄했습니다.


남편 이원수가 첩을 두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일시적으로 충격을 받기도 했다. 홍순언의 일화는 조선 후기의 소설 《이장백전》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 그의 행적은 정재숭과 박지원, 이익의 저서를 통해 일부 알려졌으나,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도 자세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가계는 남양 홍씨 첨사(詹事) 홍호(洪灝)의 동생인 예사 홍복(洪澓, 일명 홍복(洪復))의 12대손이다.


대성전에는 공자의 위패가 모셔져 있어 음력 2월과 8월에 제사를 지내는데, 이를 ‘석전대제’라 했어요. 제사에 참석하는 임금님은 대성전으로 들어오는 외삼문 앞에 이르면 가마에서 내려 걸어 들어 왔어요. 유생들은 매달 1일에 정식으로 의복을 차려입고 문묘인 대성전에 가서 네 번 절을 해야 했어요. 어느 시대나 나라에 필요한 인재를 키우기 위해 교육 기관을 설치했어요. 고구려의 태학, 신라의 국학, 고려의 국자감 등이 그런 곳이었어요.


근현대에 이르러서도 "충무공은 거의 완전무결한 인물이었다. 그러기에 성자라 하고 영웅이라 일컫는 것이다."(천관우) 등 이순신에 대한 평가는 아주 높았다. 전투의 결과를 북병사 이일(李鎰)은 녹둔도 함몰이라고 비판하였다. 처음부터 군사 10명이 피살되고 106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말 15필을 빼앗기는 등의 피해가 많았다 하여 이 녹둔도 사건으로 인해서 함경도 북병사 이일(李鎰)의 비판으로 문책받고 그해 10월 해임, 결국 투옥되었다. 북병사 이일은 이경록과 이순신을 투옥한 뒤, 1587년 10월 10일 "적호(賊胡)가 녹둔도의 목책(木柵)을 포위했을 때 군기를 그르쳤다"고 장계를 올려 이를 보고하였다. 고려 때 정5품 중랑장(中郎將)을 지낸 덕수 이씨의 시조 이돈수(李敦守)의 12대손이며, 조선 초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지낸 이변(李邊)[3]의 후손이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 세도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중들의 원망을 사고 있던 조세 제도를 개정하였다. 또한 서원을 철폐하고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회복시켜 왕권 강화를 꾀하였다. 결국 1270년 최씨 무신 정권이 몰락하자 고려는 비로소 개경으로 환도하고 더불어 몽골과 강화를 맺어 전쟁은 끝이 났다. 태봉으로 국호를 변경한 후고구려는 왕건이 세운 고려에 의해 멸망하였다. 고려는 후백제와의 공방 끝에 신라를 먼저 흡수한 뒤, 후백제까지 멸망시켜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또한 멸망한 발해 유민을 받아들여 신라보다 더 포괄적인 의미의 삼국 통일을 이루었다.


한반도 선사시대의 추정은 Wikipedia에 따르면 기원전 약 4만 년경에서 3만 년경으로 추정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시기가 우리가 국사책에서 한번쯤 보았을 법한 '구석기 시대' 입니다. 우리나라에 구석기 시대의 추정은 대부분 유물의 출토를 통하여 그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가장 대표적으로 충청남도 공주 근처의 석장리 유적에서 발굴된 양면을 뗀 석기와 떼는 도구를 들 수 있습니다. 사실 구석기 시대의 유물은 전문가들이 식별을 할 정도로 사실 정확한 형태를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반면에 신석기 시대에 들어오면서 보다 일반인들에게도 식별이 가능한 고대 유물들이 나타납니다. '공주'가 아니라 '옹주'라 불리는 이유는, 그녀가 후궁의 딸이기 때문입니다.

광양오피 목포오피 순천오피 목포오피 광주오피

Report this page